
미드나이트 인 파리 OST, 자정의 종소리와 함께 흐르는 1920년대 파리의 선율
비 오는 파리의 밤거리를 걷고 싶어지는 영화가 있습니다. 우디 앨런 감독의 〈미드나이트 인 파리〉(Midnight in Paris)는 보고 나면 이상하게도 장면보다 음악이 먼저 떠오르는 영화예요. 클라리넷이 느릿하게 흐르는 오프닝, 집시 기타가 경쾌하게 튕기는 골목길, 그리고 1920년대 파티장을 가득 채우는 재즈까지. 이 영화에서 음악은 배경이 아니라 시간 여행의 문을 여는 열쇠 그 자체입니다.
오늘은 〈미드나이트 인 파리〉의 줄거리를 간단히 짚어본 뒤, 영화를 수놓은 OST를 장면과 함께 천천히 따라가 보려 합니다.
미드나이트 인 파리 줄거리, 자정에 열리는 황금시대
2011년 개봉한 〈미드나이트 인 파리〉는 그해 칸 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되었고, 우디 앨런에게 아카데미 각본상을 안겨준 작품입니다.
주인공 길(오언 윌슨)은 할리우드에서 성공한 시나리오 작가지만, 진짜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품고 있어요. 약혼녀 이네즈(레이철 매캐덤스)와 함께 파리를 찾은 그는, 비 오는 파리를 걷는 낭만을 이야기하지만 약혼녀와 그 가족은 그런 길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던 어느 밤, 홀로 파리 골목을 헤매던 길 앞에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클래식 자동차 한 대가 멈춰 섭니다. 얼떨결에 올라탄 차가 그를 데려간 곳은 다름 아닌 그가 동경하던 1920년대 파리. 그곳에서 길은 스콧 피츠제럴드와 젤다, 헤밍웨이, 거트루드 스타인, 피카소, 달리 같은 전설적인 예술가들을 만나고, 피카소의 연인 아드리아나(마리옹 코티야르)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됩니다.
오프닝을 여는 한 곡, Si Tu Vois Ma Mère
〈미드나이트 인 파리〉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귓가에 맴도는 곡은 단연 시드니 베셰(Sidney Bechet)의 'Si Tu Vois Ma Mère'일 거예요.
영화는 대사 한 줄 없이 파리의 아침부터 밤까지를 담은 풍경 몽타주로 시작합니다. 센강, 카페 테라스, 골목길, 비에 젖은 거리가 차례로 지나가는 동안 흐르는 이 곡은 소프라노 색소폰의 느리고 애틋한 선율로 파리라는 도시를 향한 연서를 대신 읽어주는 듯하지요. 뉴올리언스 출신으로 말년을 프랑스에서 보낸 재즈 연주자의 곡이라는 점도, 과거와 현재가 겹쳐지는 영화의 분위기와 묘하게 어울립니다.
이 곡은 영화의 메인 테마처럼 쓰이며 여러 장면에서 다시 등장하는데, 들을 때마다 길이 느끼는 향수와 설렘이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파리 골목을 걷는 발걸음, Bistro Fada
또 하나의 대표곡은 기타리스트 스테판 렘벨(Stephane Wrembel)의 'Bistro Fada'입니다. 전설적인 집시 재즈 기타리스트 장고 라인하르트의 스타일을 이어받은 연주로, 경쾌하면서도 어딘가 쓸쓸한 기타 선율이 매력적이지요.
길이 파리의 거리를 설레는 마음으로 헤매는 장면들과 이 곡은 완벽하게 맞아떨어집니다. 'Si Tu Vois Ma Mère'가 파리의 낭만을 느리게 음미하게 한다면, 'Bistro Fada'는 그 낭만 속으로 한 발짝 걸어 들어가는 발걸음 같은 곡이에요. 카페에서 배경음악으로 틀어두기에도 참 좋습니다.
1920년대 파티의 주인공, 콜 포터의 노래들
길이 처음 1920년대로 넘어가 도착한 파티장에서 그를 맞이하는 건 피아노 앞에 앉아 노래하는 콜 포터입니다. 영화 속에서 콜 포터 역을 맡은 연주자 코널 포크스(Conal Fowkes)가 직접 부르는 'Let's Do It (Let's Fall in Love)'은 재치 있고 흥겨운 분위기로 관객을 단숨에 재즈 시대 한가운데로 데려다 놓지요.
콜 포터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연결고리이기도 합니다. 그의 노래 'You Do Something to Me' 역시 영화에 등장하고, 길이 현대 파리의 벼룩시장에서 콜 포터의 옛 레코드를 발견하며 가브리엘(레아 세두)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과거를 사랑하는 사람들끼리의 조용한 공감을 보여줍니다. 음악이 두 시대, 두 사람을 이어주는 셈이에요.
조세핀 베이커와 재즈 시대의 열기
1920년대 파리 장면에는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조세핀 베이커도 등장합니다. 그녀가 무대에서 춤추는 장면에 흐르는 'La Conga Blicoti'는 재즈 시대 파리 밤문화의 화려한 열기를 생생하게 전해주지요.
이처럼 영화는 1920년대 장면마다 찰스턴 리듬과 초기 재즈, 샹송을 촘촘하게 배치해 관객이 길과 함께 그 시대에 실제로 들어가 있는 듯한 기분을 만들어냅니다. 우디 앨런이 평소 재즈 클라리넷 연주자로도 활동할 만큼 재즈를 사랑하는 감독이라는 점을 떠올리면, 이 선곡이 얼마나 공들인 것인지 짐작할 수 있어요.
벨 에포크로의 두 번째 시간 여행, 캉캉
영화 후반, 길과 아드리아나는 또 한 번 시간 여행을 떠납니다. 이번엔 아드리아나가 동경하는 1890년대 벨 에포크 시대의 파리예요. 물랭루주에서 울려 퍼지는 오펜바흐의 '캉캉'은 그 시대의 흥겨움과 화려함을 단번에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영화의 주제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1920년대에 사는 아드리아나는 벨 에포크를 황금시대라 여기고, 벨 에포크의 화가들은 또 르네상스를 동경하지요. 누구나 지나간 시대를 그리워한다는 것, 음악 역시 시대마다 바뀌어 가며 이 순환을 조용히 보여줍니다.
미드나이트 인 파리 OST가 특별한 이유
〈미드나이트 인 파리〉의 음악이 오래 기억에 남는 건, 선곡 하나하나가 영화의 주제와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에 흐르는 곡 대부분은 새로 작곡된 스코어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옛 재즈와 샹송이에요. 과거를 동경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실제로 과거의 음악으로 들려주는 셈이지요.
그래서 이 OST를 듣고 있으면 영화 속 길처럼 지금 여기가 아닌 어딘가를 그리워하게 됩니다. 동시에 영화가 건네는 메시지처럼, 결국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비 오는 거리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미드나이트 인 파리 OST 추천 감상 순서
처음 들어보신다면 시드니 베셰의 'Si Tu Vois Ma Mère'로 시작해 보세요. 영화의 첫 장면처럼 파리의 공기를 가장 먼저 느끼게 해주는 곡입니다. 이어서 스테판 렘벨의 'Bistro Fada'로 파리 골목을 걷는 기분을 이어가고, 콜 포터의 'Let's Do It (Let's Fall in Love)'과 'You Do Something to Me'로 1920년대 파티장에 들어가 보시길 추천합니다.
조금 더 시대 여행을 이어가고 싶다면 조세핀 베이커의 'La Conga Blicoti'와 오펜바흐의 '캉캉'까지 들어보세요. 비 오는 날 창가에서 이 순서대로 들으면, 짧은 파리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 들 거예요.
〈미드나이트 인 파리〉는 과거에 대한 달콤한 향수를 그리면서도, 결국 지금을 사랑하는 법을 이야기하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가장 먼저, 가장 오래 전해주는 건 역시 음악이지요.
오늘 밤 자정 무렵, 불을 조금 낮추고 이 영화의 OST를 틀어보는 건 어떨까요. 어쩌면 창밖 어딘가에서 길을 태웠던 그 클래식 자동차가 조용히 멈춰 설지도 모르니까요.